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3국 동맹 전쟁 (문단 편집) === 우마이타 요새가 무너지다 === 항복이란 선택지가 없어진 파라과이는 어떻게든 우마이타 요새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1867년 11월 7일에 길고 긴 포위전으로 3국 동맹군도 지쳐 있던 상황에서 파라과이 병력 1만 명이 약 1만 5천 명이 주둔한 브라질 군 진지를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고 물자를 노획한 전투인 제2차 투유티 전투가 파라과이가 성공한 몇 안 되는 작전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전황은 바뀌지 않았고 1868년 7월 25일에는 그동안 3국 동맹군을 가장 괴롭혀 왔던 우마이타 요새(Fortaleza de Humaitá)가 함락되었다. 그 명성답게 3국 동맹군이 파라과이 영토에 들어간 후 3년 가까이 개고생을 하던 곳이었다. || {{{#!wiki style="margin:24px 0 0 16px;float:right;width:100%;max-width:600px;font-size:.9em;" [[파일:우마이타 요새 유적지.png|width=100%]][br] 파라과이의 항복 이후, 우마이타 요새는 철거되어 일부 유적만 남아있다.}}} || 요새가 함락 직전에 다다랐을 때 파울리노 알렌 장군이 로페스 대통령에게 퇴각을 요청했다가 옥쇄 명령을 받고 좌절한 뒤 권총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했다. 유감스러운 건 그 권총 자살 시도로부터 몇 시간 후 퇴각 명령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리고 1868년 말 반역 스캔들에 휘말려 사형당했다. 당시의 3년 개고생 트라우마로 인해 3국 동맹군은 전후 평화 조약에 우마이타 요새 완전 철거와 그 자리에 요새 등 군사시설 재건립 영구금지 조항을 넣어 파라과이 정부에게 사인할 걸 요구했고 파라과이 정부는 어쩔 수 없이 들어줘야 했다. 우마이타 요새 자리에는 마을이 들어서 있고 그 마을 곳곳에는 우마이타 요새 시절 지어진 교회 잔해와 무기고, 제철소 잔해나 건물이 남아 있어 관광지로 쓰이고 있다. 파라과이 국민들에게 우마이타 요새는 불굴의 의지를 상징하는 곳이다.] 때마침 1868년에 내렸던 폭우는 파라과이 강의 수위를 높여서 브라질 제국 해군 군함들의 [[아순시온]] 진입에 엄청난 도움을 줬다. 결국 1869년 1월 1일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되었고[* 이걸 스페인어: Saqueo de Asunción, 영어: Sacking of Asuncion(아순시온 약탈)이라고 한다.] 이 당시 아순시온 시가지 전체가 방화로 불타오르고 대통령궁이 다 털리고 파라과이 국립 문서 기록 보관소도 털려서 파라과이 역사 자료들과 유물들을 전부 브라질 제국군이 가져가 버려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국립 도서관 지하에 150년 넘게 박혀 있다. 전쟁 100년 후 몇몇 유물들은 파라과이에 반환됐지만 중요 문서들은 반환되지 않아 파라과이 역사학계에는 이 약탈 때문에 스페인 식민지 이전 시대는커녕 스페인 식민지 시절, 예수회, 파라과이 건국사, 전쟁 이전 파라과이 대통령들과 파라과이 최대 전성기, 그리고 파라과이 전쟁 관련 연구에 엄청난 차질을 빚었는데 화재 사고로 전부 소실되어 이제 영영 연구할 수 없게 되었다.[* 일부 기록물들은 빼내오 는 데 성공했지만 이마저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불타 없어졌다.] 로페스는 [[임시수도]]인 피리베부이로 달아나서 저항을 멈추지 않았지만 병력도 없고 무기나 지원도 물자도 없이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한편 아순시온 점령 이후 3국 동맹의 주축인 브라질 제국군 내에서는 '어차피 로페스도 이제 별 볼 일 없어졌고 파라과이에는 우리 말 잘듣는 임시정부도 세워졌으니 이쯤에서 끝내자. 전쟁의 처리는 파라과이 임시정부에게 맡기고 이들이 로페스를 막아내거나 몰아낼 수 있게 지원만 잘 해 주면 된다.'는 의견을 비쳤지만 전쟁 초부터 로페스를 끝장내기로 결심했던 황제 페드루 2세는 오직 로페스의 파멸을 계속 내세우면서 총사령관을 갈아치웠고[* 엄밀히 말하자면 경질은 아니고 황제와의 의견충돌과 계속되는 전쟁에 지친 총사령관 카시아스 후작이 스스로 사임했다. 황제는 카시아스 후작의 사임에 실망했지만 어찌됐든 전쟁 수행에 있어서 카시아스 후작의 역할이 지대했으니 그 공로를 치하하여 공작 작위를 내렸다.] 황제의 사위인 외 백작이 총사령관 자리에 오르면서 다시 전쟁이 시작되었다.[* 프랑스 출신 외 백작은 모로코, 알제리 원정 참전 경험을 갖고 있었다. 단 그 경험과는 상관없이 브라질 제국군 내에서는 낙하산, 황제빽으로 폄하받았고 위에서는 장인인 황제의 압박, 아래서는 제국군 병사와 휘하 장교의 저평가와 디스를 당하면서 항상 스트레스에 쌓이다가 공적에 대한 욕심으로 온갖 무리수를 저질렀다.] 이 기간을 파라과이 역사학계에서는 언덕의 전투라고 부른다. 이 언덕의 전투 기간 중에 벌어진 1869년 8월 12일 피리베부이 전투와 4일 뒤인 8월 16일 아코스타 뉴 전투는 3국 동맹과 파라과이군 서로 정신상태가 맛이 갈 대로 간 전투의 극치를 보여준다. 피리베부이 전투는 브라질 제국군의 엄청난 학살과 강간이 벌어졌으며[* 여기에 질린 아르헨티나 군 총사령관은 이후 전투 참여를 포기했다.] 아코스타 뉴 평원에서 파라과이군은 여기서 부상병과 노약자까지 동원하는 것도 모자라서 '''9~15세 어린이, 청소년들에게 가짜 수염을 붙여 가면서 6시간 동안 전투를 벌였고''' 항복했지만 브라질 제국군은 자비 없이 전부 죽여 버렸으며[* 전투가 끝나고 파라과이군 소년병들의 어머니들이 아들의 시신을 수습하거나 생존자들을 찾고 있을 때 브라질 제국군이 '''평원에 불을 질러 그 어머니들까지 죽고 말았다.''' 이때 방화 명령을 내린 자는 브라질 페드루 2세의 사위 오를레앙 공 가스통 백작. 4일 전 피리베부이 전투에서 마누에우 메나 바레토 장군이 전사하자 이에 대한 복수로 피리베부이 병원과 마을의 방화, 아코스타 뉴 전투의 일방적 학살과 방화를 명령한 것이었다. 이후 이 때의 야만적 학살 명령들은 브라질에서도 죽을 때까지 비난받았다. 현재 브라질에서는 이걸 "파라과이군이 연기를 피우면서 불이 일어난 걸로 위장시켜 생존자를 구출하려다 불이 번져서 피해가 커졌으니 가스통 백작은 잘못이 없고 파라과이군의 자업자득이다"라는 식으로 가르치고 있다.] 이때 어린이 전사자만 '''2,000명'''이 넘었다. 파라과이의 어린이날은 8월 16일인데 이날 전투로 죽은 어린이 2,000명을 기리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